노동 현안

산재는 기업범죄다. - 국제신문 연재 기획 시리즈

Pursued.G 2020. 8. 24. 14:49

산재는 기업범죄다 <상> 참사 부추기는 솜방망이 처벌


2018년부터 올해 4월까지 2년 4개월간 부산에서 노동자 124명이 일하다가 죽었다. 철제 코일 사이에 끼이고,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에서 떨어지고, 고압 전선에 감전되고, 타워크레인에 깔리고, 가스에 질식해서 숨졌다. 고된 노동을 버텨낸 후에 가족과 따뜻한 저녁밥을 나누리라 기대했던 이들 노동자는, 그러나 영원히 퇴근하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책임은 너무 가볍다. 특히 원청이든 하청이든 이들을 고용한 기업과 사업주는 반복되는 산업재해(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도 단돈 몇백만 원으로 죗값을 치른다. 끊이지 않는 산재를 예방하려면 가장 먼저 사업주에게 경각심을 심어줘야 하고, 그러려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양형 기준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사망 책임 안 물었다

   

국제신문은 2017년부터 지난 5월까지 부산지역 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건 81건의 판결문을 입수해 ‘사회 연결망 분석(SNA)’을 진행했다. 판결문 중 ‘이유(범죄 사실, 양형 이유 등)’에 해당하는 문장에서 명사 형용사 부사 동사 1588개를 텍스트 마이닝 기법으로 추출해 사용 빈도가 높은 19개 단어(모든 피고인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은 제외)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들 단어(이유)가 각 피고인의 양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전체 피고인 203명(법인 69, 자연인 134명) 가운데 2개 이상 단어와 연결되는 154명(법인 38, 자연인 116명)을 분석 대상으로 했다.


양형 이유가 된 단어와 피고인 간 관계를 연결망으로 그리면 눈에 띄는 특징이 발견된다. 피고인을 양형별로 표시한 <그림①>을 보면, 19개 단어를 사이에 두고 피고인 154명이 크게 3개 그룹으로 나뉜다. ‘반성’ ‘합의’ ‘피해자 과실’과 연결된 A그룹 피고인은 벌금형 또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중대 혐의’이면서 ‘추락’ ‘사망’ ‘외력’ ‘과실치사’ 등의 책임을 추궁당한 B그룹 피고인은 벌금형보다 무거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비율이 높았다. ‘사망’ ‘과실치사’의 책임이 인정됐지만, ‘중대 혐의’와는 연결 정도가 약한 C그룹 피고인은 집행유예보다 벌금형이 더 많았다.


다시 피고인을 신분별로 나타낸 <그림②>를 보면, 더 분명한 특징이 드러난다. A, B, C그룹 중 가장 가벼운 처벌을 받은 A그룹 피고인은 모두 기업(법인)이다. B, C그룹 피고인이 대부분 자연인(안전관리 책임자)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법원은 A그룹에 속한 기업에 ‘중대 혐의’를 적용하면서도, ‘반성’과 ‘합의’가 이뤄졌고 ‘피해자 과실’도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기업 대다수가 국민 법 감정과 달리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사망 사고로 기소된 기업이 둘 이상이면, 원청이 하청보다 가벼운 형을 받았다. 오피스텔 신축 공사 때 위험한 업무 지시로 50대 노동자를 추락해 숨지게 한 산재에서 하청 회사는 벌금 800만 원, 원청 회사는 벌금 500만 원을 선고(2019년 4월 부산지법 판결)받는 식이다.


산재 사망 사고 유형별로는 추락·질식·외력보다는 압착(깔림·끼임)이 상대적으로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법인과 자연인을 합쳐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단 한 명도 없을뿐더러, 항소심에서는 1심의 형량이 감형되기 일쑤였다.


■불의의 사고는 없다

   

2018년 12월 21일 부산 강서구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노동자의 안전모와 각종 장비가 바닥에 흩어져 있다. 부산 강서경찰서 제공

노동계는 이런 ‘솜방망이 처벌’이 기업에 ‘벌금이 안전관리에 들이는 비용보다 싸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반발한다. 2016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치사) 사건 양형 기준은 징역 6월~1년 6월이다. 감경하면 징역 4~6월, 가중 처벌하면 징역 10월~3년 6월이다. 기업을 제재하는 수단은 벌금형밖에 없는데, 현행 양형 기준에는 벌금형 규정이 전혀 없다. 올해부터 시행된 개정 산업안전보건법(김용균법)은 기업의 벌금형 수위를 종전 1억 원 이하에서 10억 원 이하로 10배 높였지만, 아직 대법원 양형 기준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현재 ‘과실치사상 범죄군’에 속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양형 기준을 별도 범죄로 분리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산재가 ‘과실’이나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안전관리 의무를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기업 범죄’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는 논리다. 지난 6월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김영란 양형위원장을 만나 직접 양형 기준 조정을 요청하고, 최근 노동계를 중심으로 ‘중대 재해 기업 처벌법’ 제정 운동이 활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에 국제신문이 분석한 판결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그대로 옮긴다. ‘안전 조치를 소홀히 한 채 만연히 사업장, 공사 현장 등을 가동함으로써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에게, 근로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안전 조치 및 보건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러한 조치를 하였더라면 사고의 발생을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단지 비용과 시간을 줄이기 위한 편의성만을 위하여 안전 조치를 충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자에게 작업하게 함으로써 발생한 인명 사고에 대하여 더는 과실범이라거나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안이라거나 근로자도 안전 수칙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관대하게 처벌할 수만은 없다’.


이미 2018년 9월 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 선고된 이 판결의 취지가 지금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 오늘도 안전한 퇴근을 위협받는 노동자들이 묻는다. (기사보기)



<산재는 기업범죄다 - 기사 목록>


산재는 기업범죄다 <중> 외줄 타는 노동자


산재는 기업범죄다 <하>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


[데스크시각] 오늘 또 노동자가 죽었다 /권혁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