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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5) - 김근태의 민주대연합론

Pursued.G 2018. 12. 29. 15:37

대선의 분열과 패배를 극복하고 와해된 민통련을 대체하는 운동진영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선생은 이부영등과 함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결성을 주도했다. 89년 1월 창립대회를 연 전민련은 반외세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투쟁, 조국통일운동을 활동방향으로 설정하였다.




이 같은 목표아래 '노태우 정권의 민중운동 탄압 및 폭력테러 규탄대회'를 개최하고, '광주학살 5공비리 민중생존권탄압 책임자 노태우-부시 규탄 국민투쟁 기간'을 선포, 노태우 정부와의 전면전을 전개했다.




전민련 건설 당시 선생은 '대선에서의 전술적 차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중층적 타협을 통해 신속히 공동체를 건설해야 된다' 는 주장으로 전민련 발족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또한 이후 정부와의 투쟁에서 운동세력의 전선과 제도정치권의 전선이 이중으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전략을 전개해야 된다는 '두개의 전선론'을 내세워 운동권 내부에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89년은 격랑의 한해였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되어 이부영,조성우,권형택 등 전민련 간부들과 운동권 인사들이 대거 구속되었고 전민련 내부에서도 합법정당건설에 대한 이견으로 분란이 생기고 있었다. 이우재, 장기표 등은 89년 9월 2차 대회에서 전민련을 탈퇴한다.




또한, 90년 3월에는 400여명의 진보정당 준비모임 인사들이 빠져나갔다. 이때 선생은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파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민주세력의 정치화는 합법정당 건설이 아니라 민족민주전선 강화와 제도정치공간에서 공개정치부대를 구축, 단일한 민주연합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 전민련 잔류를 선언한다. 


한편, 90년 1월에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3당 통합을 발표한다. 선생은 전민련의 정비의 책임을 맡아 정책위원장에 선임 된 후 5월 9일 전국 18개 지역에서 20만명이 참여하는 '민자당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국민궐기대회'를 주도하고 구속된다.


선생은 민주화 세력 내부에서 제기되었던 합법정당건설의 실패를 예감하고 있었다. '군부정권이라는 정부의 본질적 성격과 3당 통합으로 인한 거대여당의 출몰로 위기는 격화되었으나 정부의 부분적인 의사 개량화 조치가 위기감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게 한다'고 진단하였다.


통합된 재야의 강력한 힘과 제도정치권이 연합해야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거대여당의 횡포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선생은 훗날 재야의 합법정당건설론에 대해 '재야의 일부가 제도권내에 어떻게 자기의 교두보를 구축하는가의 문제를 정치세력화로 잘못 해석' 했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남겼다.

선생은 92년 2월 만기출소한다. 3당 통합 이후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개혁입법은 대부분 무산되었고, 91년 시위 중 강경대가 전경에게 타살 당한 후 분신정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요 인사들의 구속 이후 활동이 약해졌던 운동세력은 전열을 가다듬고 전노협,전교조,국민연합등이 주도하여 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발족한다.



전민련 이후 다시 한번 통합이 이루어진것이다. 한편, 전민련 시절 시절부터 일부에서 논의된 합법정당 건설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합법정당 건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선통합파, 선창당파로 갈려졌고, 선통합파인 이부영,유인태는 이기택의 민주당(민자당 합류를 거부한 의원들이 창당)과 통합하였다. 선창당파인 이재오,이우재,장기표 등은 90년 11월 민중당을 창당하고 91년 지방선거, 92년 총선을 준비한다.


민중당은 91년 1월에 치뤄진 지방선거에서 42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1명 당선, 92년 3월에 치뤄진 14대 총선에서 51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채 정당법에 의해 해산된다. 처절한 실패였다. 당 지도부였던 이재오, 김문수 등은 민자당에 입당한다.


이 당시 합법정당 건설론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했고, 민중의 정치역량이 강화되었으며, 사상의 통합성이 높아지고 지배체제가 고도화되었으므로 대중정당이 필요하며 그것은 합법적 지위를 갖고 활용 하여야 한다.-장기표"


"지하정당은 사노맹의 활동에서 보이듯이 존립 자체가 어렵고, 활동의 의의도 크지 않다. 국민대중 속에서 사랑받는 조직으로 당을 건설해야 한다. 당은 반합법, 비합법 운동의 지도기관이 아니고 민중권력 창출을 위한 전략적 자리매김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김문수"

분열된 후 처절한 실패를 거듭하고 있던 운동세력에 대해 선생은 출소 후 다음과 같은 진단을 하였다.

"우리의 운동 상황은 위기이다. 첫째 세계사적 변화, 세계사적 변화는 우리의 운동을 제약한다. 지난 시기 일정하게 가정되었던 모델은, 실천적으로 명백히 폐기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변화가 한국에 미칠 영향, 그 속에서 우리 운동의 발전근거를 고민해야 한다. 냉전은 종식되지 않았지만 분단 이데올로기가 대중속에서 상당부분 희석되어 가고 있다는 점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 가능성과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


둘째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변화, 체제의 개량은 어느정도는 성취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다음 지배세력이 양보를 통해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측면을 같이 봐야 한다. 물론 지배세력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상황의 변화에 대해 본질이 변화하지 않았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무능한 고집이다.

이러한 무능의 반대편에는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구조화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기본적인 인권의 보장, 명실상부하게 공정한 선거를 통한 경쟁, 평화적 정권 이양의 규칙 확보등이 선행되어야 할 민주주의의 구조화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운동세력의 합법제도정당이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론적인 가정으로 채택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우리 운동은 분열했다. 반복된 실험을 통해 추진한 사람들의 정치적 권위가 손상되었을뿐 아니라 민족민주운동 세력의 위신에도 결정적 손상이 오게 된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