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분류2018. 11. 20. 19:24

<모두가 다 떠날때 남아 있던 유일한 사람 노회찬, 그가 떠났다>

"노회찬이 떠났다. 너무 낯설다. 그는 원래 떠나지 않고 계속 남는 사람이였다. 아마 그래서 그가 진보신당을 탈당 했을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 후로 농반 진반으로 노심조에게 원한이 있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 뿐이였다. 잘 되길 바랬고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응원했고, 지켜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길이 다르지 않았음을, 그가 있었기에 나 같은 얼치기가 투정 부리며 입 찬 소리 하고 살 수 있었음을.

그런 그가 정말 떠났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많은 기사가 그의 발자취를 '인민노련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국회에 입성했다' 고 쓴다. 그 한줄에 마음이 찢어진다. 이 글은 그 우여곡절에 관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 진보정당의 역사를 논하는 것은 매우 우울한 일이다. 기쁨의 순간은 짧고 대부분이 좌절과 절망, 슬픔으로 점철돼있기 때문이다.


각성한 학생들이 노동자의 길을 걷겠다며 공단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80년대 초반, 노회찬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기술을 배워 노동자가 되었고 노동법과 사상을 학습하고 조직을 만들어 법전에만 써있던 노동자의 권리를 알리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인천의 한 공장에 취업한 노회찬은 동료들과 지하조직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을 만들어 노동운동을 전개 해 나갔다. 독재정권의 심각한 탄압으로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수배자가 되어 활동이 위축되던중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한다. 


인노련은 '살인 고문 강간 정권 타도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독재정권 타도투쟁의 전면에 서게 된다. 이들은 항쟁이 진행되던 중 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연맹(인민노련)을 출범시킨다.


87년 대선국면에서 백기완을 민중후보로 추대한 이들은 대선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 강화와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군부독재 종식이라는 절박한 사명앞에서 백기완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며 중도사퇴하였고 독재세력의 일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인민노련은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는 물론 이후 반정부투쟁, 노동운동의 전면에 서게 된다.

89년 조직사건으로 노회찬 등 지도부가 구속된 후 인민노련은 삼민동맹,노동계급등의 그룹과 '한국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움직임은 비합법적 혁명노선을 폐기하고 합법적인 노동자당 건설을 추진하자는 주대환의 신노선을 채택한 결과였다.


그러나 주대환 등 지도부가 발기인대회 직전에 구속되었고 남은 이들은 민중당과 통합하여 92년 총선을 치뤘으나 3%의 득표를 하지 못해해산된다. 민중당의 핵심이였던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등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92년 초 출소한 노회찬은 남은 사람들과 함께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조직하고 사무총장을 맡는다.


92년 대선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민중후보론을 내세우며 백기완을 출마시켰고 노회찬은 선본 조직위원장을 맡는다. 87년에 시도하였던 독자후보 출마 및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꿈을 또 한번 꾼 것이다. 그러나 백기완은 1%를 득표하는데 그쳤고 또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된다. 노회찬이 남았다.


그는 노동자 중심의 진보적 대중정당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조직을 정비하며 남은 사람들과 또 길을 나선다.  해산된 민중당의 뒤를 이을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시간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노회찬의 노선이 받아들여졌고 진정추는 위원회의 형태로 95년까지 활동한다.


진정추는 95년 4월 오세철교수가 대표로 있던 민중정치연합(민정련)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진정련)을 만들었으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50명 정도였던 상근자들이 대부분 떠났고 95년에 사무실을 옮길때 노회찬 옆에는 이재영만 남아 있었다.


96년 총선국면에서 진정련은 진보세력의 대연합,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지자체선거의 참여를 통한 진보정당창당 사업의 활성화, 사회대개혁투쟁의 적극적 전개를 통한 정치적영향력 강화를 목표로 선거에 임하였지만 또 한번 처참한 실패를 겪는다. 사람들은 또 떠났고 노회찬이 남았다.


96년 12월 김영삼 정부가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 시키자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단행한다. 많은 국민의 호응을 받았고 이 총파업은 운동권 진영이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 민주노총에서 정치세력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민주노총과 진정연, 전국연합이 함께 ‘국민승리21 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97년 대선을 위한 국민승리21이 출범하였으나 많은 부침이 있었다. 대선국면에서의 회합에서는 2-300명의 활동가들이 모였으나 대선이 끝난 후 삼선교로 사무실을 옮길때는 불과 15명만이 왔다. 또 노회찬이 남았다.


87년부터 노회찬이 꿈꿔왔던 노동자 중심의 진보적 대중정당의 건설은 그의 회고를 빌면 "꿈이 있기에 기죽지도 힘들지도 않았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길이였다.


그는 2년여의 풍찬노숙의 세월을 견뎌내며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진정련과 민주노총이 주축이 되었고 대선후에도 국민승리21의 대오를 이탈하지 않았던 울산연합과 경기동부연합이 힘을 합쳤으며 추후 전국연합이 합류를 결정하여 민주노동당은 범진보진영이 모두 참여하는 정당이 되었다.


이들은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방선거를 통해 제도권 진출의 가능성을 높여 갔으며 마침내 2004년 총선을 통해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함으로 노동자정당의 원내진출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뤄낸다.


노회찬은 이때 삶의 목표의 절반을 이뤘다며 기뻐했고 대중적인 진보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남는 사람 노회찬이 떠났다. 그것도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믿을 수도 받아 들일 수도 없다, 그가 없는 세상을 살 자신도 준비도 없다. 그래서 그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을 것이다"


Posted by Pursue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