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이런 트윗을 보게 되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그게 아니에요, 라는 말을 하려다 이런 타래를 써버림..
결론을 먼저 말하면, 92년엔 이미 다 망했다. 뭐가 92년에 분화를 해...
<정파를 찾아서>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NL, PD라는 정파는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이론투쟁과 활동을 주도했다. 90년대 초반 이후 영향력을 상실하긴 했지만 현대 한국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게 이 두 정파에 대한 이해이다.
92년 이후 두 정파가 분화되고 이론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엉터리 역사소설 같은 트윗을 보고, 기억 나는 대로, 또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대강의 흐름을 정리 해 본다. 참조자료는 나중에 소개하기로.
시대별로 보자면, 1980년~83년의 무림-학림, 야학비판-학생운동의 전망, 1984~85년의 MC(Main Current)-MT(민주화투쟁학생연합, 민투의 영어약자), 86년 이후의 NL-CA, NL-PD 간의 이론투쟁으로 구분 될 수 있을 것이다.
무림-학림의 대립은 80년을 지나오며 학생운동의 오류와 미래의 전망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재학생지도부의 단계적 투쟁론을 무림이, 비공개지도부의 전면적투쟁론을 학림이 이어 받은 상황이였다.
무림이라는 이름은 안개속의 학생조직이란 뜻이라고 하며, 80년 12월 11일 서울대 학생식당 앞 4명의 학생이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시작되었고, 학림은 81년 전민학련이 첫 모임을 가진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따온 이름이다.
무림사건은 당시 무림의 지도부가 무-학 논쟁의 격화로 인해 조직이 경찰에 노출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들의 입장을 공개 선언함으로 논쟁의 난맥상을 정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도 되었다.
이 사건으로 250여명이 경찰조사를 받았으며, 9명이 구속되고, 90여명이 강제징집을 당했다. 유인물 작성자인 인하대 김명인 교수는 이때 잡혀가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하였다.김교수는 이렇게 사건이 커질줄은 몰랐다고 회상한다..
경찰은 이 사건으로 서울대조직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믿고 몇년간은 대학가시위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81년 개강직후 서울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 이 시위의 주동자는 유기홍(@yookihong)과 문용식(@green_mun) 등 5명.
이들은 학생회관 3층의 한 방을 점거하여 플래카드를 내걸고 횃불을 들고 창틀에 올라서서 '반파쇼 민주화 투쟁선언' 을 낭독했다. 또 맞은편 도서관 난간에는 박태견(현 뷰스앤뉴스 대표)이 올라가 구호를 외쳤다. 양동작전이였다.
한편, 마침 이날 저녁 인문대 여학생 휴게실에서는 1학년 여학생 모임이 있었다. 독서토론 모임이였는데 시위에 대한 토론으로 주제가 바뀌었다. 이 때 유독 한 학생이 시위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전두환의 딸이였다고..
아무튼 서울대 시위를 시작으로 5월 중순까지 부산대,동국대,성균관 대 등에서 모두 8차례의 시위가 일어났다. 6월부터 대규모 검거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이태복, 이선근을 시작으로 30여명이 구속되었다.
이 들이 만든 조직의 이름은 '전국민주학생연맹', 경찰은 이 조직을 학림이라 이름 지었다. 같은해 9월 부산에서 발생한 용공조작사건은 부산의 학림, 부림사건으로 불려졌고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다.
학생운동의 큰 두 축이던 무림과 학림은 각각 학생운동의 역량강화(무림), 정치투쟁에서 선도적 역할(학림)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 핵심 인물들이 모두 구속 또는 강제징집 되버린다.
이후 무림을 계승한 학생운동권은 야학비판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민중의 역량강화를 위한 노동 현장의 참여를, 학림을 계승한 운동권은 학생운동의 전망이라는 책자를 통해 반독재투쟁에서의 선도성을 주장하였다.
야비와 전망의 논쟁은 이후 무림의 후신인 MC와 학림의 후신인 MT간의 논쟁으로 전개되었고 85년 사구체논쟁으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사진은 박현채,조희연이 당시의 논쟁에 대해 정리해 집필한 서적. 총 4권)
이후 MC그룹은 대중노선을 정립하여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받아들인 민족해방(NL)그룹으로, MT그룹은 제헌의회소집투쟁론을 주장하면서 제헌의회그룹(CA)로 발전해갔다. (사진은 CA그룹 검거 기사)
조직의측면으로 보자면, 당시 운동권은 81년 해체된 전학련(전국총학생회연합) 이후 투쟁위원회-삼민투(민족,민주,민중투쟁) 형태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사구체논쟁의 격화 이후 민민투와 자민투로 재편성되었다.
NL그룹은 자민투(자주민족투쟁위원회), CA그룹은 민민투(민족민주투쟁위원회)로 조직을 재정비 했으며 주류는 NL. 80년대 후반 CA는 제헌의회론을 폐기하면서 민족민주주의를 제창하는 ND(Nation Democracy)로 재정리 되었고,
주체사상을 반대하는 NL좌파와 CA의 일부가 모여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PD(People Democracy)를 조직했으며, 주류였던 NL은 87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ND는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럼 다시 사구체논쟁에 대해.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은 1980년대 대표적 민주화 운동 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내부의 CDR, NDR, PDR 논쟁까지 소급되며, 85년 창작과비평에 실린 '한국자본주의논쟁' 기획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현채교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이대근교수가 주변부자본주의론 입장을 설파한 것을 시작으로 점화된 이 논쟁은 이후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학계뿐 아니라 운동권에서도 퍼져 나갔다.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을 집필한 조희연(@joeunedu)은 논쟁의 시기를 준비기(80년대 초반), 소시민적이론 vs 맑스이론 대립의 1단계 논쟁기(80년대 중반), NL 과 CA가 대립한 2-1기(86-87), NL과 PD가 대립한 2-2기(88-89),
소련 붕괴 후 맑스이론의 견지와 수정노선이 대립한 3기(89년이후)로 구분한 바 있다. 10년여의 짧은 시기에 백가쟁명의 사회변혁 사상과 노선이 치열하게 경쟁한 것이 바로 이 사구체 논쟁이었다.
사회구성체란 1859년 맑스가 쓴 정치경제학비판의 서문에서 처음 사용한 '경제적 사회구성체(ökonomische Gesellschaftsformation)를 말하며, 논쟁은 극단적으로 줄이자면, 당시 한국 사회의 성격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중대장 출신이며, 소설 태백산맥의 빨치산전사 '조원제'의 모델이며,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경제학자로 민족경제론을 주창했으며, DJ의 대중경제론의 실제기획자인...
박현채 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 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사회를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한편, 이대근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사회를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이 관철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동일시 할 수 없는 특수한 성격의 자본주의”인 주변부 자본주의로 진단했다.
이렇게 시작된 논쟁은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운동권과 사회주의자 등등등이 다 참여.. 하거나 한쪽 발이라도 담그게 되는.. 치열하고 복잡한 사상투쟁으로 이어진다.
1단계 논쟁기에서 주변부자본주의론은 한 사회의 성격이 온전히 외부세력에 의해서만 규정되는가 하는 문제 제기와 자주에 대한 방법론의 미비로 인해 점점 힘을 잃게 되었고, 80년대 중반 노동운동의 활성기와 맞물린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부각되게 된다.
2단계 논쟁기는 NL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들은 반외세 자주화와 직선제 개헌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공개 투쟁을 시작하였고 전두환독재에 염증을 느끼던 대중의 호응을 얻게 되었는데,
이 NL은 사상적으로는 한국사회가 온전한 자본주의가 아니며 식민지의 성격과 반봉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식민지 반봉건론(식반론)으로 당시까지의 주류이던 국독자론을 제압하며 운동권의 사상적 근간도 장악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은 87년 4월 13일, 대통령 국정연설을 통해 올림픽 개최를 이유로 개헌논의를 89년까지 유보한다고 발표하였다. 야당인 신민당과 민추협은 즉각 천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였고 재야,학계,종교계등의 시국선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 자민투-NL그룹-는 '반외세,직선제 개헌'의 두 슬로건 중 반외세에 역점을 두고 반미자주화의 틀 안에서 개헌투쟁을 전개 해 나갔고 민민투는 '헌법제정 민중회의'를 주장하며 개헌투쟁 무용론을 들고 나온다.
한편 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하였던 노동운동세력은 서울노동운동연합을 결성하는데, 이들은 야당과 차별화 된 '삼민헌법 개헌투쟁론'을 개진하였다. 당시 서노련의 지도부는 김문수(@kimmoonsoo1) 와 심상정(@sangjungsim).
이 당시 학생운동권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상대 정파 시위불참은 물론 방해를 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86년 5월, 전방입소거부를 외치며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이 사건은 민민투를 반미투쟁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힘을 합치자는 결의로 이어져, 완벽한 합의는 아니지만,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을 출범시키기로 한다. 애초 연세대에서 열기로 한 출범식은 경찰의 눈을 피해 건국대로 옮겨졌는데..
5-6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시작한 집회는 경찰의 원천 봉쇄로 장기철야집회가 되버리고 만다.이 건국대 사태는 NL그룹의 중점 노선이 반외세 자주화에서 직선제 개헌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터져나온 분노는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며 직선제 개헌을 성사 시킨다. 87년 대선에서 NL그룹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CA그룹은 백기완을 민중 후보로 추대한다.
부연하자면, 문익환 목사가 의장으로 있던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등의 범NL그룹이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CA그룹(민민투,인민노련,서노련 등 향후 범PD로 분류)이 독자후보추대를 주장하며 백기완을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87년 대선의 실패는 운동권 내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NL그룹의 위축과 노선 수정, CA그룹의 해체와 비판적 계승자인 PD그룹의 출현으로 압축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88년 4월 총선 이후 남북통일 논의의 활성화와 올림픽 공동개최 투쟁 및 6.10 남북학생회담투쟁을 계기로 NL노선은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CA그룹은 총선 전술의 실패와 노선 비판을 통해 제헌의회론을 폐기하고 PD세력으로 재구성 된다.
사상적인 측면을 보자면, NL그룹은 한국 사회를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파악하였고 NLPDR론의 입장에서 반미 운동을 추진 했으며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PD진영은 전통적 맑스주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가 국제 자본주의 질서의 분업체계에 예속되어 있는 신식민지이며 자본주의적 원리가 관철된다는 전제 아래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화된 사회라고 보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입장이였다.
즉, 한국 사회의 기본 모순은 계급모순이며 독점자본화가 진행된 상태이므로 독점자본과 그 상부구조인 파시즘을 중요한 공격 대상으로 설정한다. 또한 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로 반주체사상의 입장을 띠게 된다.
한편, 사구체 논쟁이 진행되던 중 86년 이진경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사구체 논쟁이 추상적 개념 논쟁으로 빠져들고 있다면서 최소한의 방법론상의 검토가 선행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88-89년에 걸쳐 운동권의 대립구도가 NL-PD로 굳어가면서 정파적 정체성도 단단해져서 이 시기 이후 정파간 이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시 조직,세력 상황을 살펴 보자면..
87년 대선에서 독자 민중후보출마를 주장했던 세력은 '민중이 직접 건설하는 진보정당'을 목표로 정당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 들의 이념적 성향은 PD 성향의 합법정당노선을 지지한 인사들로, 이우재,장기표,김문수,정태윤 등이였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아무튼 이들은 90년 11월 민중당을 창당하고 91년의 지방선거와 92년 총선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민중당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운동세력은 (인민노련,삼민동맹,노동계급)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을 준비하는데..
부연설명이 좀 필요한 부분. 이 들은 애초 노동자혁명을 꿈꾸던 세력들로 합법정당 , 총선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천안문사태,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그리고.. 소련의 해체를 잇달아 겪으며 노선을 수정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 때 주대환(@boar54)은 신노선을 주장하였는데 요약 하면 비합법적 혁명노선의 폐기가 핵심이였다. 한사당 창당준비위원들은 91년 12월 경주에 모여 신노선 채택을 결정하였다. 한편 사노맹등은 이 결정을 청산, 투항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들은 92년 한국노동당 발기인 대회를 가지고 정당 건설을 시도하였지만, 끝내 성사 시키지는 못하고 민중당과 통합하여 92년 통합민중당으로 총선을 치루게 된다. 결과는 잘 아시다시피.. 2% 득표율을 달성하지 못해 해체 되었다...
나름의 시각과 해석은 있지만 최대한 사실관계만 적으려 노력했고, 정파의 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기에 사건,조직,단체 등은 많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감정을 좀 담아 그 후의 이야기를 적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에필로그)
소련의 해체, 혁명노선을 포기하면서까지 추진했던 합법정당의 실패 등 되는게 하나도 없던 PD들은.. 대부분 넋이 나갔고.. 학교로 돌아가거나 유학을 가거나 사업을 하거나 남아서 이상한 소리를 하거나.. 그랬다.
노동운동 하던 분들은 90년 전노협을 만들고 구속되는게 일상다반사인 삶을 살면서 진짜 바득바득 견뎌오다 마침내 95년 민주노총을 만들었는데, 이듬해 신한국당은 노동법을 거지같이 만들어서 날치기 해버린다.
열받은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감행했다. 동원도 잘되고 분위기도 좋았는데 법개정은 더 엉터리로 되버렸고.. 총파업을 계기로 사이가 좀 좋아졌던 NL, PD가 힘을 합쳐서 국민승리21로 97년 대선에 도전한다. 권영길!
이 국민승리 21이 기반이 되어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민주노총은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한다. 그리고 2004년 총선에서 10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마침내 노동자정당의 원내진출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게 된다.
한편.. 독자정당 건설엔 통 관심이 없었던 (일부) NL들은.. 2001년 군자산에서 단합대회를 하고 민주노동당에 입당을 하는데 참 좆같은 짓을 많이 했다. 아무튼 NL은 당을 접수하고 탈탈 털린 PD들은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만들게 된다.
이 후의 이야기는 다들 너무 잘 아실테니 생략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