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대신 뺨 내민 민주노총
이제 노사정 사회적 합의 구도의 수렁에서 벗어나야
코로나 사태가 촉발한 경제위기 국면에서 진행된 ‘노사정 사회적 합의’는 지난 7월 1일 조인식 직전에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 대다수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현장 조합원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사정 합의안을 대의원대회(온라인 대의원투표)에 상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렇듯 민주노총은 또다시 노사정 사회적 합의 구도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수렁의 역사는 반복된다. 민주노총은 창립 직후인 1996년부터 현재까지 여섯 번의 노사정 사회적 합의를 추진했다.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김영삼 정권-권영길 집행부), 1998년 노사정위원회(김대중 정권-배석범 직무대행 집행부), 2004년 노사정대표자회의(노무현 정권-이수호 집행부), 2006년 노사정대표자회의(노무현 정권-조준호 집행부), 2009년 노사정대표자회의(이명박 정권-임성규 집행부), 그리고 현재 문재인 정권하의 노사정대표자회의다.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청사진을 만든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1990년 초부터 기업 차원의 신(新)경영전략을 추진한 자본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조 약화를 위한 국가 차원의 신자유주의 제도화를 강력히 요구했다. 김영삼 정권도 출범과 동시에 세계화를 주창하면서 노동시장 유연화를 들고나왔다. 이런 흐름에서 김영삼 정권은 1996년에 ‘신(新)노사관계 추진’을 발표했고, 이를 위해 민주노총에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를 제안했다. ‘정리해고제를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집행부는 노개위 참가를 밀어붙였다. 당시 김영삼 정권이 가입을 추진하고 있던 OECD의 국제노동기준에 혹하여 민주노총의 합법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96년 5월부터 시작된 노개위 협상에서 정부와 자본이 노리는 변형근로제‧정리해고제‧파견제가 점점 더 부상했다. 결국 민주노총은 10월 14일 노개위 회의에서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 조건부 검토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이 노동시장 유연화를 수용했다’는 언론의 대서특필 보도가 이어졌다. 이는 김영삼 정권이 정리해고제 날치기 통과를 강행하는 강력한 근거가 됐다.
이뿐만 아니다. 노개위 논의과정에서 미합의 사항들은 1996년 11월 7일 ‘노‧사‧공익 최종안’으로 정리됐다.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검토가 가능하다’는 민주노총 입장이 문서화됐고,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쟁의 시 대체근로 허용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임금체계 개편 등 이후 20년간 진행될 신자유주의 노동개악의 청사진이 마련됐다. 이 개악안들은 민주노총이 반대하든 조건을 내걸든 관계없이, 노개위라는 노사정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공식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를 갖게 됐다. 이후 매 시기마다 진행된 노사정 사회적 합의는 노개위에서 마련한 노동개악 총론을 하나씩 실현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자본주의 경제위기에서 고통전가를 제도화한 1998년 노사정위원회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곧이어 11월 26일에 전경련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정리해고제를 즉각 실시하고 파견제를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선된 김대중 정권의 제안으로 1998년 1월 15일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다. 1월 20일, 민주노총 배석범 직무대행 집행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동의했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비롯한 10대 의제에 합의했다. 바로 다음 날인 1월 21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에서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공동선언문을 비판하는 중앙위원 연서명 현장대자보 부착은 물론, 총파업을 위한 2월 3일 비상중앙위원회와 2월 6일 2시간 경고총파업이 결정됐다.
그런데 2월 6일, 민주노총 집행부는 정리해고제 및 파견제 실시에 합의해 버렸다. 집행부는 ‘전교조 합법화’와 ‘공무원 직장협의회 설치’를 성과로 내세우며 2월 9일 대의원대회를 소집했으나, 이 합의안은 찬성 54, 반대 184, 기권 34로 부결됐다. 집행부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민주노총은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정리해고제와 파견제에 동의했다’는 절차적 명분을 내세워 국회에서 개악안이 처리됐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동의해 준 정리해고제와 파견제의 고통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 고통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비정규직 제도 개악, 노사관계로드맵 처리에 들러리 서준 2004~09년 노사정대표자회의
2004년 5월 31일 노무현 정권은 ‘대화와 상생의 협력적 노사관계 구축’을 내세우며 노사정대표자회의 구성을 제안했다.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들어가 노사정위원회 개편을 논의하는 와중에,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노동시장 유연안정성’을 내걸고 비정규직 법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함께 만든 비정규직 법안과 정면충돌했다.
민주노총은 정부안 강행 시 총파업투쟁을 벌이겠다고 결정했다. 노무현 정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4년 11월 26일 비정규직 법안 국회 환노위 상정을 강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2005년 1월 20일 정기대의원대회에 ‘노사정위원회 참가안’을 상정했다. 논란 끝에 대의원대회(대대)가 성원 미달로 무산되자 집행부는 2월 1일 다시 대대를 소집했으나, 노사정 합의에 반대한 조합원과 활동가들의 단상점거 투쟁이 벌어졌다. 집행부는 3월 15일 또다시 대대를 강행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노사정위원회 복귀가 실패하자, 민주노총 집행부는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 결정을 통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재개했다. 그러나 정부와 경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의 비정규직 법안 논의를 거부했다. 민주노총을 노사정 합의 구도의 수렁에 붙잡아 두기 위해 국회 환노위에서 또 다른 노사정 논의틀을 제안하자, 민주노총 집행부는 그 속에도 들어갔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두 개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자본과 정권은 비정규직 법안 강행의 절차적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 와중에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뇌물수수 사건으로 이수호 집행부가 사퇴하고 조준호 집행부가 들어섰지만, 새 집행부는 또다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 문제를 제기했다. 논란 끝에 2006년 6월 19일, 노조 전임자 임금과 복수노조 문제, 특수고용노동자 노동3권, 손배가압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국노총과 경총은 물밑에서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3년 유예’하는 데 합의했고, 민주노총이 제기한 의제들은 사실상 실종됐다. 결국 2006년 말,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를 조건으로 한 노동법 개악안과 비정규직 관련 개악안이 국회에서 강행처리됐다.
2009년 민주노총 임성규 집행부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를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노조 전임자 임금 문제에서 타임오프제로 실익을 챙길 뿐,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해 야당 의원들을 몰아내고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행처리해 버렸다. 그 후과는 노조파괴였다
(이번 호 <변혁정치> 32면 기사 “추미애법’ 10년, 민주노조 말살 획책” 참고).
이제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1996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민주노총은 노사정 사회적 합의에 매달려 왔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정리해고제, 파견제, 대체근로, ‘무노동 무임금’, 전임자 임금,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등 주요한 노동 의제에서 자본과 정권의 의도가 관철됐다. 노사정 사회적 합의 구도는 자본과 정권의 노동개악을 관철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지금 또다시 과거의 전철을 되밟으려 한다. 7월 23일 대의원투표를 강행하고 민주노총 집행부는 사퇴하면 그만이겠으나, 코로나 사태가 촉발한 자본주의 경제위기에서 조합원과 미조직 노동자대중이 떠안게 될 고통은 누가 책임지겠는가? 이제 그만 노사정 사회적 합의의 수렁에서 벗어나자. (전문보기)